관서하동정씨족보구간지(關西河東鄭氏族譜舊刊識)
조선조(朝鮮朝) 중세(中世)에 와서 난리(亂離)가 거듭되었다. 오랫동안 동서(東西)로 쫓기고 남북(南北)으로 이산(離散)되는 와중(渦中)에서 조상(祖上)의 분묘(墳墓)와 문헌(文獻)을 보존(保存)할 방도(方途)가 없었으니 외침(外侵)과 치정(治政)의 혼란(混亂)이 중첩(重疊)된 때에 우리 낙향시조(落鄕始祖) 휘(諱) 임(霖)의 분묘(墳墓)도 예외(例外)일 수 없었다.
근본(根本)을 알 수 없는 데 실체(實體)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니 종형(宗兄)이신 성와공(省窩公) 용징씨(龍徵氏)는 효성(孝誠)과 학행(學行)으로 명망(名望)이 있던 분으로 항상(恒常) 마음 한구석에는 두비현(斗枇峴)에 버려진 채 있는 마석(磨石)의 각자(刻字)에 근거(根據)하여 설단향사(設壇享祀)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겨 왔다. 일칠구팔년(一七九八年)(숭정후삼년(崇禎後三年) 무오(戊午))에 선천(宣川)에 사는 송씨(宋氏) 한 분이 묘지표문(墓誌表文)을 얻었는데 거기에 「정공림지묘(鄭公霖之墓)」라 되어 있었다. 우리 제종(諸宗)이 감격(感激)한 나머지 모두 모여 분묘(墳墓)를 짓고 잔디를 입혀서는 비(碑)를 세운 뒤에 설단(設壇)한 것을 철훼(掇毁)하였다.
아아! 낙향선조(落鄕先祖)의 유택(幽宅)인 선영(先塋)을 찾으므로 해서 철산이후(鐵山以後)는 연계(連系)가 되나 그 이상(以上)의 세계(世系)는 아득하여 취(取)할 근거(根據)와 방도(方途)가 없다. 나뭇가지는 수만(數萬) 가지로 뻗었으나 근저(根底)를 알 길 없고, 천파만지(千派萬支)의 천류(川流)가 있어도 원천(源泉)을 찾을 수 없어서 휑하게 빈 궁천(穹天)과 같은 때에 이 또한 무슨 해괴(駭怪)하기 이를 데 없는 기록(記錄)과 전의설(傳疑說)을 조작(造作)하여 사람을 괴롭히려는 것일까,
이는 곧 경신년(庚申年) 봄에 족숙(族叔) 치척씨(致鸐氏)께서 경성(京城)에 유(留)하실 때 청주인(淸州人) 전도사(前都事) 정최성씨(鄭最成氏)가 보첩(譜牒)을 간행(刊行)하려고 석가산동(石加山洞)에서 한 장의 글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그것이 쌍벽헌석록(雙碧軒釋錄)이라고 했다. 거기에 보면 방조(傍祖)이신 감역공(監役公)께서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남(長男) 영(霙)은 일찍이 요절(夭折)하였고, 차남(次男) 임(霖)은 해서(海西)로 유배(流配)되었더니 그에게 아들이 있어 혹(或) 「용(龍)」이라 하고 혹(或) 「덕부(德溥)」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자의(字義)에 맞추어 쓴 명자(名字)가 아니겠는가, 치척씨(致鸐氏)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기뻐한 것은 그 서생(瑞生)의 명자(名字)에 임(霖)과 용(龍) 이자(二字)가 연계(連系)된 보책(譜冊)이었으므로 그것의 전오권(全五卷)을 가져 왔다.
내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 경솔(輕率)하게 그 기록(記錄)을 믿으려고 하는가, 이른바 석의록(釋疑錄)이란 것은 내가 보기로는 그 내용(內容)이 근래(近來)에 개작(改作)된 것으로서 작은 지면(紙面)에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얘기로 급히 부자지간(父子之間)이라고 칭(稱)했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果然) 유사(類似)한 징험(徵驗)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지면(紙面) 속의 사실(事實)을 보충(補充)하고 방증(傍證)할 만한 명확(明確)한 근거(根據)나 자료(資料)도 없이 이 옳지 못한 내용(內容)을 스스로 인정(認定)하려고 한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 보첩(譜牒)을 만약(萬若) 그냥 이대로 전(傳)한다면 후손(後孫)들이 반드시 금석문(金石文)으로 고정(固定)시켜 다시 변통(變通)의 여지(餘地)도 없이 오전(誤傳)될 가능성(可能性)을 배제(排除)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제종씨(諸宗氏)들과 공의(公議) 「임(霖)」, 「용(龍)」 두 자(字)를 삭제(削除)하고는 그 이유(理由)를 그 밑에 주(註)를 달아두어 다음에 다시 참고(參考)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우리 족조(族祖) 현세씨(顯世氏)의 구보서문(舊譜序文)을 살펴보면 양주(楊州) 우리 종친(宗親)의 가승(家乘)에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휘(諱) 광윤씨(光允氏)의 제육대손(第六代孫) 휘(諱) 임씨(淋氏)께서 도승지(都承旨)의 관직(官職)으로서 철산(鐵山)에 유배(流配)됐다는 기록(記錄)이 있음을 언급(言及)하고 있고, 그 시기(時期)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십이년(十二年)(일○오육(一〇五六))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記錄)에서는 시조(始祖)를 부원군(府院君)으로 오인(誤認)하고 있으므로 나는 그 기록(記錄)이 사실(事實)과 다르다고 주장(主張)했다.
율령지표(栗嶺誌表)에서 이미 우자(雨字) 아래의 임자(霖字)로 단정(斷定)하였으므로 곧 수변(水邊)의 임자(淋字)는 낙향시조(落鄕始祖)의 휘자(諱字)가 아님이 저절로 입증(立證)된 것이다. 또 낙향시조(落鄕始祖)께서 재세(在世)하신 시기(時機)가 곧 세조(世祖) 성종간(成宗間)임도 아울러 심증(心證)이 가는데 위 기록(記錄)에서 여조(麗朝)라고 한 것은 논리상(論理上)으로도 부합(符合)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혹(或) 태초(太初)에 생민(生民)이 본래(本來)의 시조(始祖)가 있었음에도 내려오는 사이에 천재지변(天災地變)과 병화(兵火) 등(等)으로 인(因)해 세계(世系)가 어찌 간단(間斷)없이 소상(昭詳)하게 이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같은 의심(疑心)되는 사실(事實)을 두고 억지로 타족(他族)에 연계(連系)하여 수족(收族)의 본래(本來)의 대의(大義)를 그르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보(譜)에서도 이같은 의문(疑問)을 인정(認定)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낙향비조(落鄕鼻祖)를 관서(關西)의 일문(一門)으로 단정(斷定)하는 것보다 낫다고 할 것이다. 내 생각으로 자칫 잘못하면 그런 오섭(誤謵)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 십삼대조(十三代祖)의 일로써 그리 먼 사실(事實)이 아닌데도 이같은 의문점(疑問點)을 밝혀내지 못하고 자포자기(自抛自棄)하는 것은 선조(先祖)가 있는 자손(子孫)으로 취(取)할 바가 못된다. 우리의 상계(上系)를 바로 잡기 위(爲)해서 오직 인문(印文)ㆍ자판(字板)ㆍ서적(書籍) 등(等)에 의존(依存)할 따름이다.
내가 일찍이 들은 바에 의(依)하면 낙향시조(落鄕始祖)께서 낙향(落鄕)한 시기(時期)가 일사오○년(一四五〇年)~일오○오년(一五〇五年)(경태(景泰), 천순(天順), 성화(成化), 홍치(弘治)) 사이로 추정(推定)되며, 일대(一代)와 이대(二代)가 선천(宣川)에 있는 정가동(鄭哥洞)에서 살다가 삼(三), 사대(四代)에 와서 철산취암(鐵山鷲巖)으로 이사(移徙)한 것 같으며, 그때 호적대안(戶籍大案)이 강화(江華), 한양(漢陽), 평양(平壤) 삼부(三府)에 유치(留置)된 것 같으나 난리(亂離)로 인(因)하여 살펴 구(求)할 만한 곳이 없으니 어찌 개탄(慨嘆)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옅은 식견(識見)으로 감(敢)이 글을 써서 편말(篇末)에 부치니 후손(後孫)들이 시조(始祖)의 전말(顚末)을 상세(詳細)히 살피는 데 있어 지금(至今)까지 언급(言及)한 나의 생각을 참된 자료(資料)로 삼는다면 내가 청주(淸州)의 쌍벽헌석의록(雙碧軒釋疑錄)에 적은 내용(內容)이 사실(事實)과 같지 않다고 한 말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선천(宣川)의 호적대안(戶籍大案)의 일이 어찌 사실(事實)과 동떨어진 허황(虛荒)된 것이라고 하겠는가. 모든 종중(宗中)의 효손(孝孫)께서 나의 이 뜻을 버리거나 바꾸지 말고 각자(各者)가 힘써서 보정(補正)해야 할 일임을 알 것이다.
일팔이칠년(一八二七年)(순종(純宗) 이십칠년(二十七年) 춘(春) 정해(丁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