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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관서하동정씨족보구간지(關西河東鄭氏族譜舊刊識)2026-09-1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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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西河東鄭氏族譜舊刊識(丁亥譜)

粵在中古兵燹數矣東西奔竄失墓失系者在在皆然惟我落鄕始祖諱霖氏墓山初不知何所而搜求不得我宗兄省窩公龍徵氏素以誠孝學行聞悒悒慨然於斗枇峴磨石刻字以爲依歸壇而祀之其後崇禎後三戊午宣川宋姓人得誌表有曰鄭公霖之墓云惟我諸宗感喜咸集因爲封莎而碣掇其舊壇嗚呼落鄕先塋旣是連系而其以上世系邈無可徵木萬枝而無根水千派而無源廓然穹壤此何人斯異聞之錄傳疑之說又何多也庚申春族叔致鸐氏方留京邱時淸州人前都事鄭最成方爲刊譜於石加山洞出示一紙書稱謂雙碧軒釋疑錄略曰其傍祖監役公瑞生氏有二子長曰霙早夭次曰霖流落海西而有子或曰龍或曰德溥無乃取龍德溥施之義以爲字耶致鸐氏見其書而顚倒驚喜其瑞生名下以霖龍二字鋟榟連系以全譜五卷而來愚曰何其率爾也彼所謂釋疑錄吾嘗見之其辭意紙面殆近矯餙今以尺紙荒唐之說遽然連系稱謂父子其果有類利之驗耶恐未免崇韜之譏矣此譜若存則後世子孫必以爲金石之文而牢不可變通愚與諸宗公議其霖龍二字圈而削之懸註於其下以俟後考且按我族祖顯世氏舊譜序略曰楊州姓親家乘有河東府院君諱光允氏第六代孫諱淋氏以都承旨謫鐵山而時則麗朝文宗十二年云故或以府院君爲始祖愚曰不然栗嶺誌表旣得雨下之林卽其水邊之淋不攻自破而且落鄕始祖似在於我朝 世祖成宗之間而此言麗朝者相左遠甚或曰厥初生民原有鼻祖而萬世後其可盡系乎與其置疑而連系於他族曷若以落鄕初爲鼻祖而別立關西之一門乎愚日無已無然乎雖然惟我十三代去古未遠况有疑似之說若不搜求而自棄則先祖有肯曰有後乎搜求之道他無計策惟考信於印章#籍而已也愚嘗聞落鄕之時似在於景泰天順成化弘治之間而一二代卜居於宣川鄭哥洞三四代因家於鐵山鷲巖云其時戶籍大案想必留於江華漢陽平壤三府而但以其兵火之後無處可徵豈不慨嘆哉愚以薄識淺見敢爲文字附於篇末而如是多言者欲使來裔俾知顚末察詳眞贋則淸州之錄安知非望郢之北耶宣川之籍安知非指越之南鄭凡我諸宗孝孫勿贊此意其各勉旃

崇禎二百年丁亥(一八二七年)春 十三代孫 思朂 謹識

 

 

관서하동정씨족보구간지(關西河東鄭氏族譜舊刊識)


조선조(朝鮮朝) 중세(中世)에 와서 난리(亂離)가 거듭되었다. 오랫동안 동서(東西)로 쫓기고 남북(南北)으로 이산(離散)되는 와중(渦中)에서 조상(祖上)의 분묘(墳墓)와 문헌(文獻)을 보존(保存)할 방도(方途)가 없었으니 외침(外侵)과 치정(治政)의 혼란(混亂)이 중첩(重疊)된 때에 우리 낙향시조(落鄕始祖) 휘(諱) 임(霖)의 분묘(墳墓)도 예외(例外)일 수 없었다.

근본(根本)을 알 수 없는 데 실체(實體)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니 종형(宗兄)이신 성와공(省窩公) 용징씨(龍徵氏)는 효성(孝誠)과 학행(學行)으로 명망(名望)이 있던 분으로 항상(恒常) 마음 한구석에는 두비현(斗枇峴)에 버려진 채 있는 마석(磨石)의 각자(刻字)에 근거(根據)하여 설단향사(設壇享祀)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겨 왔다. 일칠구팔년(一七九八年)(숭정후삼년(崇禎後三年) 무오(戊午))에 선천(宣川)에 사는 송씨(宋氏) 한 분이 묘지표문(墓誌表文)을 얻었는데 거기에 「정공림지묘(鄭公霖之墓)」라 되어 있었다. 우리 제종(諸宗)이 감격(感激)한 나머지 모두 모여 분묘(墳墓)를 짓고 잔디를 입혀서는 비(碑)를 세운 뒤에 설단(設壇)한 것을 철훼(掇毁)하였다.

아아! 낙향선조(落鄕先祖)의 유택(幽宅)인 선영(先塋)을 찾으므로 해서 철산이후(鐵山以後)는 연계(連系)가 되나 그 이상(以上)의 세계(世系)는 아득하여 취(取)할 근거(根據)와 방도(方途)가 없다. 나뭇가지는 수만(數萬) 가지로 뻗었으나 근저(根底)를 알 길 없고, 천파만지(千派萬支)의 천류(川流)가 있어도 원천(源泉)을 찾을 수 없어서 휑하게 빈 궁천(穹天)과 같은 때에 이 또한 무슨 해괴(駭怪)하기 이를 데 없는 기록(記錄)과 전의설(傳疑說)을 조작(造作)하여 사람을 괴롭히려는 것일까,

이는 곧 경신년(庚申年) 봄에 족숙(族叔) 치척씨(致鸐氏)께서 경성(京城)에 유(留)하실 때 청주인(淸州人) 전도사(前都事) 정최성씨(鄭最成氏)가 보첩(譜牒)을 간행(刊行)하려고 석가산동(石加山洞)에서 한 장의 글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그것이 쌍벽헌석록(雙碧軒釋錄)이라고 했다. 거기에 보면 방조(傍祖)이신 감역공(監役公)께서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남(長男) 영(霙)은 일찍이 요절(夭折)하였고, 차남(次男) 임(霖)은 해서(海西)로 유배(流配)되었더니 그에게 아들이 있어 혹(或) 「용(龍)」이라 하고 혹(或) 「덕부(德溥)」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자의(字義)에 맞추어 쓴 명자(名字)가 아니겠는가, 치척씨(致鸐氏)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기뻐한 것은 그 서생(瑞生)의 명자(名字)에 임(霖)과 용(龍) 이자(二字)가 연계(連系)된 보책(譜冊)이었으므로 그것의 전오권(全五卷)을 가져 왔다.

내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 경솔(輕率)하게 그 기록(記錄)을 믿으려고 하는가, 이른바 석의록(釋疑錄)이란 것은 내가 보기로는 그 내용(內容)이 근래(近來)에 개작(改作)된 것으로서 작은 지면(紙面)에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얘기로 급히 부자지간(父子之間)이라고 칭(稱)했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果然) 유사(類似)한 징험(徵驗)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지면(紙面) 속의 사실(事實)을 보충(補充)하고 방증(傍證)할 만한 명확(明確)한 근거(根據)나 자료(資料)도 없이 이 옳지 못한 내용(內容)을 스스로 인정(認定)하려고 한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 보첩(譜牒)을 만약(萬若) 그냥 이대로 전(傳)한다면 후손(後孫)들이 반드시 금석문(金石文)으로 고정(固定)시켜 다시 변통(變通)의 여지(餘地)도 없이 오전(誤傳)될 가능성(可能性)을 배제(排除)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제종씨(諸宗氏)들과 공의(公議) 「임(霖)」, 「용(龍)」 두 자(字)를 삭제(削除)하고는 그 이유(理由)를 그 밑에 주(註)를 달아두어 다음에 다시 참고(參考)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우리 족조(族祖) 현세씨(顯世氏)의 구보서문(舊譜序文)을 살펴보면 양주(楊州) 우리 종친(宗親)의 가승(家乘)에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휘(諱) 광윤씨(光允氏)의 제육대손(第六代孫) 휘(諱) 임씨(淋氏)께서 도승지(都承旨)의 관직(官職)으로서 철산(鐵山)에 유배(流配)됐다는 기록(記錄)이 있음을 언급(言及)하고 있고, 그 시기(時期)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십이년(十二年)(일○오육(一〇五六))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記錄)에서는 시조(始祖)를 부원군(府院君)으로 오인(誤認)하고 있으므로 나는 그 기록(記錄)이 사실(事實)과 다르다고 주장(主張)했다.

율령지표(栗嶺誌表)에서 이미 우자(雨字) 아래의 임자(霖字)로 단정(斷定)하였으므로 곧 수변(水邊)의 임자(淋字)는 낙향시조(落鄕始祖)의 휘자(諱字)가 아님이 저절로 입증(立證)된 것이다. 또 낙향시조(落鄕始祖)께서 재세(在世)하신 시기(時機)가 곧 세조(世祖) 성종간(成宗間)임도 아울러 심증(心證)이 가는데 위 기록(記錄)에서 여조(麗朝)라고 한 것은 논리상(論理上)으로도 부합(符合)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혹(或) 태초(太初)에 생민(生民)이 본래(本來)의 시조(始祖)가 있었음에도 내려오는 사이에 천재지변(天災地變)과 병화(兵火) 등(等)으로 인(因)해 세계(世系)가 어찌 간단(間斷)없이 소상(昭詳)하게 이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같은 의심(疑心)되는 사실(事實)을 두고 억지로 타족(他族)에 연계(連系)하여 수족(收族)의 본래(本來)의 대의(大義)를 그르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보(譜)에서도 이같은 의문(疑問)을 인정(認定)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낙향비조(落鄕鼻祖)를 관서(關西)의 일문(一門)으로 단정(斷定)하는 것보다 낫다고 할 것이다. 내 생각으로 자칫 잘못하면 그런 오섭(誤謵)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 십삼대조(十三代祖)의 일로써 그리 먼 사실(事實)이 아닌데도 이같은 의문점(疑問點)을 밝혀내지 못하고 자포자기(自抛自棄)하는 것은 선조(先祖)가 있는 자손(子孫)으로 취(取)할 바가 못된다. 우리의 상계(上系)를 바로 잡기 위(爲)해서 오직 인문(印文)ㆍ자판(字板)ㆍ서적(書籍) 등(等)에 의존(依存)할 따름이다.

내가 일찍이 들은 바에 의(依)하면 낙향시조(落鄕始祖)께서 낙향(落鄕)한 시기(時期)가 일사오○년(一四五〇年)~일오○오년(一五〇五年)(경태(景泰), 천순(天順), 성화(成化), 홍치(弘治)) 사이로 추정(推定)되며, 일대(一代)와 이대(二代)가 선천(宣川)에 있는 정가동(鄭哥洞)에서 살다가 삼(三), 사대(四代)에 와서 철산취암(鐵山鷲巖)으로 이사(移徙)한 것 같으며, 그때 호적대안(戶籍大案)이 강화(江華), 한양(漢陽), 평양(平壤) 삼부(三府)에 유치(留置)된 것 같으나 난리(亂離)로 인(因)하여 살펴 구(求)할 만한 곳이 없으니 어찌 개탄(慨嘆)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옅은 식견(識見)으로 감(敢)이 글을 써서 편말(篇末)에 부치니 후손(後孫)들이 시조(始祖)의 전말(顚末)을 상세(詳細)히 살피는 데 있어 지금(至今)까지 언급(言及)한 나의 생각을 참된 자료(資料)로 삼는다면 내가 청주(淸州)의 쌍벽헌석의록(雙碧軒釋疑錄)에 적은 내용(內容)이 사실(事實)과 같지 않다고 한 말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선천(宣川)의 호적대안(戶籍大案)의 일이 어찌 사실(事實)과 동떨어진 허황(虛荒)된 것이라고 하겠는가. 모든 종중(宗中)의 효손(孝孫)께서 나의 이 뜻을 버리거나 바꾸지 말고 각자(各者)가 힘써서 보정(補正)해야 할 일임을 알 것이다.


일팔이칠년(一八二七年)(순종(純宗) 이십칠년(二十七年) 춘(春) 정해(丁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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