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교족보서(三校族譜序)
무릇 씨족(氏族)이 있으면 족보(族譜)가 있고, 족보(族譜)가 있으면 예로부터 연계(連系)돼온 대수(代數)가 있다. 우리 정씨(鄭氏)로서 철산(鐵山)에 거주(居住)한 사람이 수천호(數千戶)에 달할 뿐 아니라 타향(他鄕)에 이거(移居)한 자(者)도 기천호(幾千戶)가 된다. 우리 정씨(鄭氏)가 사는 곳마다 대성촌(大姓村)을 이루고 있으나 보책(譜冊)에는 상세(詳細)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니 이는 보(譜)에는 있으나 분명(分明)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대다수(大多數)인 것 같다.
지금 우리 족보(族譜)를 간행(刊行)하려고 하나 아직 미비(未備)된 것이 대수(代數)이다. 또 보(譜)는 선조(先祖)로부터 내려오는 대수(代數)와 친족간(親族間)의 원근(遠近), 친소(親疏)들의 분파지계(分派支系)를 소상(昭詳)하게 밝히는데, 그 큰 의의(意義)가 있으니 족보(族譜)를 올바르게 만들지 않으면 어찌 세대(世代)의 원근(遠近)과 종족(宗族)의 친소(親疏)를 구별(區別)할 수 있겠는가.
우리 정씨(鄭氏)의 내계(來系)가 아득하게 멀어 족보(族譜)가 없을 수 없고 대수(代數)도 상세(詳細)히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족보(族譜)의 간행(刊行)에 앞서 족보(族譜)에 관련(關聯)된 자료(資料)를 얻으러 강화도(江華島)를 찾았으나 거기에서 아무런 자료(資料)도 얻지 못했으니 이는 난리(亂離)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근래(近來)에 또 한양(漢陽)에 가서 자료(資料)들을 찾아 보았으나 여기에서도 또한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난리(亂離)로 인(因)해 모든 것이 흩어지고 망실(亡失)되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정씨(鄭氏)가 상계(上系)를 이어오지 못하고 다만 한림공(翰林公)께서 철산(鐵山)의 낙향시조(落鄕始祖)가 되셨는데, 그 분묘(墳墓)가 실전(失傳)되었더니 지난 무오년(戊午年)에 처음으로 선천(宣川)에서 지표(誌表)를 찾음으로서 선천(宣川) 산면(山面) 율동(栗洞) 신창후산(新倉後山)에 개봉(改封)하니 이는 어찌 우리 선조(先祖)께서 적덕(積德)하신 결과(結果)가 아니겠는가.
또 한곳에 모아야 할 것이 각각(各各) 나누어진 것을 분파(分派)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씨족(氏族)이 근원(根源)을 삼고 내려온 원류(源流)가 흡사(恰似) 하수(河水)가 구천(九天)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이 높고 먼 곳이므로 그 분파(分派)됨은 또 삼상(三湘) 및 오호수(五湖水)와 같다. 이 분파(分派)된 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천(源泉)을 만나게 되니 나누어 흘러가는 지파(支派)라 해도 하나도 궐루(闕漏)되서는 안된다. 이에 우리 족보(族譜)를 새로이 다듬어 개간(改刊)함에 있어 먼저 그 근원(根源)을 찾아 뗏목을 타고 운하(運河)를 가듯 해야 할 것이다.
아아! 시조(始祖) 한 분의 뒤가 칡넝쿨처럼 뻗어 십여파(十餘派)로 나누어진 지금 보(譜)를 개간(改刊)하는 일이 어찌 중대(重大)한 일이 아니겠는가. 종장(宗長)의 명(命)을 받들어 이상(以上)과 같이 서(敍)하노라.
일팔이칠년(一八二七年)(정해(丁亥)) 십월(十月)에 후손(後孫) 영(永)이 근서(謹序)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