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교족보서(三校族譜序)
한(漢)나라 태사공(太史公) 분(忿)이 사마보서문(司馬譜序文)에서 사마씨(司馬氏)의 근원(根源)이 사마착(司馬錯)을부터 시초(始初)가 되었다고 한 것과 소분생(蘇忿生)으로 시조(始祖)를 삼고 있다. 그러나 마착(馬錯)으로부터 마천(馬遷)에 이르기까지의 대수(代數)를 정확(正確)하게 알 수 없으니 그 서문(序文)에 나타난 사실(事實)을 올바로 밝히지 않으면 참고(參考)할 수 없고, 또 생(生)에서 노천(老泉)에 이르기까지의 대수(代數)가 어떻게 되는지 족보(族譜)가 아니면 알 수 없으니 이러한 사실(事實)이 보첩(譜牒)을 만드는 까닭이 된다.
아아! 우리 정씨(鄭氏)가 멀리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국내(國內) 어디를 가나 대성(大姓)이 되었고, 그 중(中)에 철산정씨(鐵山鄭氏)가 가장 번창(繁昌)하였다. 지난 일육육육년(一六六六年)(병오(丙午))에 선종장(先宗長) 종교씨(宗僑氏)께서 주창(主倡)하여 간행(刊行)한 보첩(譜牒)이 나온지 벌써 오십일년(五十一年)이 지났고, 병신년(丙申年)에 종장(宗長) 신흥씨(信興氏)가 주간(主幹)한 연보(聯譜)도 지금 오십이년(五十二年)째다. 자손(子孫)이 더욱 번성(繁盛)하여 지금(至今) 아들이 부계(父系)를 잇지 못한 것과 손자(孫子)가 조부(祖父)의 계적(系籍)에 들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들은 아들대로, 손자(孫子)는 손자(孫子)대로 그 조손간(祖孫間)에 몇 촌(寸)의 할아버지와 손자(孫子)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아우와 아우사이는 몇 촌(寸)의 형제(兄弟)사이인지 확실(確實)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친족(親族)끼리 서로 만나더라도 타인(他人)과 같이 서먹서먹하게 되니 이에 종장(宗長) 동혁씨(東赫氏)가 개연(慨然)히 수족(收族)의 뜻을 내어 유지(有志) 몇분과 더불어 해를 거듭하여 수단(收單)한 바 드디어 편집(編輯)을 마치게 되어, 이 족보(族譜)를 맞이하는 자들에게는 효도(孝道)하고 근친(近親)하는 마음이 유연(油然)히 솟아날 것이다.
아아! 우리 시조(始祖)께서 낙향(落鄕)하신 후(后)로는 아직까지 상계(上系)를 잇지 못함은 선인(先人)들의 유한(遺恨)으로 이미 오랜 세월(歲月)이 흘렀다. 이에 내가 지평(持平) 현박족손(顯璞族孫)과 현감(縣監) 의명(義命) 등(等)과 함께 한성(漢城)과 강화(江華)에 이르기까지 두루 찾아다녔으나 역시(亦是) 신빙(信憑)할 만한 흔적(痕迹)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에 사마씨(司馬氏)의 서문(序文)에서 기술(記述)된 사실(事實)과 소씨(蘇氏)의 족보(族譜) 편집(編輯)의 일을 회상(回想)하지 않을 수 없도다. 그 유감(遺憾)어린 회포(懷抱)가 나와같이 심(甚)하였을까. 또다시 신빙(信憑)할 만한 흔적(痕迹)을 찾을 길이 없으므로 관향(貫鄕)을 그대로 하고 한림공(翰林公)을 중시조(中始祖)로 삼아 이 보책(譜冊)이 출간(出刊)된 것이다.
서기(西紀) 일팔이칠년(一八二七年)(세(歲) 정해춘(丁亥春))
후손(後孫) 오위장(五衛將) 처종(處宗)이 근서(謹序)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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