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자료

Title장령(掌令) 전(篆) 서(序)2026-09-14 10:13
Name Level 10

우(又)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일찍이 사관(史官)들이 의아(疑訝)해 한 사실(事實)들은 기록(記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서(尙書)에서 보면 하(夏)나라 오성(五聖)께서 뚜렷한 기사(記事)가 아니면 사견(私見)으로 감(敢)이 확신(確信)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역사사실(歷史事實)에 있어서도 의심(疑心)스러운 점(點)이 일찍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종정(鍾鼎)은 하우(夏禹)의 치민(治民)에 있어 상징적(象徵的)인 기본용기(基本用器)로서 그의 이 고기(古器)가 어찌 귀(貴)하지 않으며 현손(顕損)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하동정씨(河東鄭氏)의 족보(族譜)에는 상당(相當)한 의문점(疑問點)이 있다. 우리 관향(貫鄕)이 시초(始初)부터 백세(百世)를 내려오는 과정(過程)에서도 뚜렷하게 확신(確信)을 갖지 못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오직 철산(鐵山)의 고족(古族)임은 확신(確信)할 수 있다.

철산정씨(鐵山鄭氏)가 하동정씨(河東鄭氏)의 한림공(翰林公)에서 분파(分派)되어 낙향시조(樂鄕始祖)가 된 것은 국사(國事)에 간언(諫言)하여 시비(是非)를 고(告)하다 왕(王)의 노여움을 사 철산(鐵山)으로 유배(流配)된 것에서 비롯되었으니 곧 하동정씨(河東鄭氏)의 장말(將末)이 되었다. 간쟁(諫諍)의 일로 사단(事端)이 벌어지고 이어 종결(終結)되는 과정(過程)에서 사가(士家)의 흥쇠(興衰)가 뒤바뀌는 기회(機會)를 맞이하게 되니 이같은 지경(地境)에 이르면 황망중(慌忙中)에 가족(家族)을 보호(保護)하기조차 어려운데 하물며 문헌(文獻)따위에 생각이 미칠 겨를이 있겠는가!

옛날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구년(九年) 봄에 육부촌(六部村)의 명칭(名稱)을 바꾸었을 때 평진부(平珍部)를 본피부(本彼部)라 하고는 정씨(鄭氏) 성(姓)을 사성(賜姓)한 것이 우리나라 정씨(鄭氏)의 시초(始初)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제족(諸族)의 종파(宗派)로서 연일(延日)ㆍ동래파(東萊派)가 이 본피(本彼)의 정씨(鄭氏)로 계속(繼續)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본피정씨(本彼鄭氏)의 첫 번째 결보(缺譜)라고 할 수 있다.

고려말(高麗末)에 와서 국룡(國龍)이란 휘자(諱字)를 가지신 분을 하동군(河東君)이라 했는가 하면 또 휘(諱)가 광윤(光允)인 분을 하동군(河東君)이라 했는데 철산비조(鐵山鼻祖)가 그 어느 군(君)의 가승(家乘)에서 전(傳)해온 것인지는 상세(詳細)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국룡씨(國龍氏)를 하동군(河東君)으로 생각해 온 종인(宗人)과 이와는 달리 광윤씨(光允氏)를 하동군(河東君)으로 여겼던 종인(宗人)들이 각각(各各) 수백년(數百年) 동안 그 정통성(正統性)을 인정(認定)할 만한 증거(證據)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하동족보(河東族譜)가 결보(缺譜)가 된 두 번째 까닭일 것이다.

한림공(翰林公)의 휘자(諱字)가 본래(本來) 우자(雨字)로 인식(認識)되어 왔다. 그러나 뒤에 풍양비문(豊壤碑文)을 참고(參考)한 바로는 광윤씨(光允氏)께서는 육남(六男)을 두셨는데 휘(諱) 의검(儀儉)으로 관(官)이 부사(府使)였던 이분이 한 아들을 낳으시니 휘(諱) 희탄(熙坦)으로 관(官)이 숭록대부(崇祿大夫)였는데 묘소(墓所)가 풍양(豐壤)에 있었다. 희탄씨(熙坦氏)가 네 아드님을 두셨으니 이름을 모두 수자변(水字邊)의 글자에서 가려 지었는데 둘째 아드님의 휘자(諱字)가 임(淋)으로 관(官)은 또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으며 철산(鐵山)에 유배(流配)된 기록(記錄)이 있다.

혹(或) 벌레가 수변(水邊)을 박식(剝食)한 것에다가 우자(雨字)를 위에 더한 것으로 시해(豕亥)의 와전(訛傳)된 것이 아닌가. 자설(字說)을 말하면 우자(雨字)는 수자변(水字邊)의 글자보다 자의(字義)가 위에 있으므로 공후가(公侯家)의 자손(子孫)에게 이름을 내릴 경우(境遇)에 우자(雨字)를 버리고 수자변(水字邊)의 글자를 따른다는 것은 올바른 사례(事例)를 무시(無視)하는 격(格)이 되며, 하물며 가첩(家牒)에 전(傳)하고 있는 바를 어찌 경솔(輕率)하게 바꿀 수 있겠는가. 이 사실(事實)이 또한 철산보(鐵山譜)에 있어 결보(缺譜)의 세 번째 원인(原因)이 된다.

이상(以上) 세가지 결보(缺譜)된 사실(事實)이 분명(分明)한데 억지로 보정(補正)하려함은 가치(價値)있는 일이 못되니 오히려 우리 정씨(鄭氏)가 숭조추원(崇祖追遠)의 정성(精誠)과 충효(忠孝)의 정신(精神)을 자손만대(子孫萬代)에 전(傳)하는 일이 중요(重要)하다고 하겠다. 일문(一門)이 충효(忠孝)로 빛나는 모암공(慕菴公)과 그 아우 증참의공(贈參議公), 양무공(襄武公), 강서공(江西公), 창성공(昌城公), 부장공(部將公) 등(等)의 육충(六忠)이 역사(歷史)에 그 이름을 빛내고 있으니 비록 후대(後代)의 자손(子孫)들이 충효정신(忠孝精神)을 등한시(等閑視)하려고 한들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본피부(本彼部)에서 사성(賜姓)의 광영(光榮)을 입은 이후(以后)로 수천년(數千年)에 걸쳐 그 경사(慶事)로움이 이어져 이제 철산(鐵山)에서 빛나도다. 우리 정씨(鄭氏)의 한 줄기 혈맥(血脈)이 어찌 이렇게도 원대(遠大)한 것일까!

병오년(丙午年) 원보간행후(原譜刊行後)에 만 촌수(寸數)의 자손(子孫)들이 더욱 번성(繁盛)하여 서로 얼굴을 알 수 없는 자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그러므로 구차(苟且)스럽게 조상(祖上)을 높이려들지 않더라도 수족(收族)함에 힘써 모두 근본(根本)을 소중(所重)히 여길 줄 알게 된다면 위의 세가지 사실(事實)로 인(因)해 결보(缺譜)된 것을 근심할 필요(必要)가 없으니 오히려 다릉안씨(茶陵顔氏)의 충절(忠節)과 낭야제갈씨(琅珈諸葛氏)의 의열(義烈)을 자손(子孫)들에게 가르치지 못할까 두려워 할 따름이다. 내가 은연중(隱然中)에 이러한 사실(事實)이 세보(世譜)를 통(通)해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을 근심함이니 한림공(翰林公)을 비조(鼻祖)로 삼아 문헌(文獻)에 전(傳)해 오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 이다.

경자년(庚子年) 겨울 종장(宗長)이신 부호군(副護軍) 익하씨(益夏氏)께서 일가(一家)인 내추(來樞), 동좌(東佐), 지현씨(趾顯氏) 등(等)에게 유사(有司)의 소임(所任)을 맡기시고는 말씀하시기를 전종장(前宗長)이신 동중추(同中樞) 신흥씨(信興氏)와 성와거사(省窩居士) 용징씨(龍徵氏)가 일찍이 족보출판(族譜出版)을 위(爲)하여 자판조각(字板彫刻)의 공역(工役)을 시작(始作)하고자 했으나 재력(財力)이 미치지 못하여 성사(成事)시키지 못한지 육년(六年)이 지난 오늘에 불행(不幸)하게도 동추공(同樞公)이 서거(逝去)하시어 또한 공역(工役)을 이루지 못하니 한스러운 일이다. 이제 내가 종장(宗長)의 소임(所任)을 맡게 되었으나 나이 구십(九十)이라.

또다시 동추공(同樞公)의 전례(前例)를 따를까 염려(念慮)되므로 제군(諸君)들은 부지(父志)를 이어받아 이 일을 천연(遷延)시키지 말고 감동인(監董人)으로 충실(充實)히 마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그 일을 선주(宣州) 광산재(匡山齋)에서 완성(完成)하였으니 전후(前後)의 집사(執事)들이 보역(譜役)에 쏟은 공(功)이 다대(多大)함을 제명(題名)하여 아래에 싣는다. 지현씨(趾顯氏)께서 우리 보(譜)가 수년(數年)동안에 걸쳐 각고(刻苦) 끝에 수고(手苦)로이 이루어졌으니 그대가 권수(卷首)에 기(記)하라고 하시니 이 말씀을 받들어 간략(簡略)하게 쓰노라.


서기(西紀) 일칠육육년(一七六六年) 병신춘(丙申春)

후손(後孫) 장령(掌令) 전(篆) 서(序)

Comment
Captcha Code
(Enter the auto register prevention c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