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께서 가라사대 「나는 오히려 사(史)의 궐문(闕文, 빠진 글)에 미쳤다」 하시고, 서(書)에 가로되 「하오(夏五)」라 하였으니, 성인(聖人)도 감히 사견(私見)으로써 공사(公史)에 신(信, 신빙)을 징(徵)하지 아니하였다. 무릇 사(史)의 궐(闕)함은 그 옛것(古)을 보존(保存)하는 까닭일 뿐이다. 이지러지고서야(缺) 정(鼎)의 주뉴(周紐)를 알고, 꺾여야(折) 종(鍾)의 우(禹, 우임금)를 아니, 그 고기(古器) 됨이 이지러지고 꺾임을 귀(貴)히 여기지 않으리오.
우리 정씨(鄭氏)의 보문(譜文)이 많이 갖추지 못하니, 한 근본(本)이 비롯된 바가 비록 유동(乳瞳, 어릴 때)에 서로 이어졌으나 백세(百世)의 멀음인즉 비이(鼻耳, 코와 귀, 즉 계통)가 서로 이어지지 못하니, 그 고족(古族)됨을 철산(鐵山)에서 가히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원래(原) 무릇 철(鐵)의 정씨(鄭氏)는 한림공(翰林公)에서 시작(始)하니, 대개 일을 말함(言事)이 뜻(旨)을 거슬러 변방(邊)으로 사민(徙, 옮겨짐)되어 철산인(鐵山人)이 되었다 하니, 그 하동(河東)이 장차 끝나고 철산(鐵山)이 장차 시작되는 즈음이었던가. 무릇 시말(始末)의 즈음은 사가(士家)의 흥체(興替, 흥망)하는 기회(機會)이니, 종이(宗彛)와 성홀(省笏)도 오히려 그 고가(故家)를 보전(保全)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문헌(文獻)이랴.
옛적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때에 육부(六部)의 호(號)를 고쳐서 우진부(于珍部)로써 본피부(本彼部)를 삼고 성(姓)을 정(鄭)으로 사(賜)하니, 동방(東方)의 정씨(鄭氏)가 여기에서 비로소 보이니, 그 후 여러 종족(宗族)의 종(宗)인 연일(延日)ㆍ동래(東萊) 같은 것도 다 능히 본피(本彼)를 우러러 잇지 못하니, 본피(本彼)가 보(譜)를 이지러뜨린 것이 하나이다.
여조말(麗朝末, 고려말)에 이르러 휘(諱) 국룡(國龍)이 하동군(河東君)이 되고 휘(諱) 광윤(光允)이 하동군(河東君)이 되었으나 철산(鐵山)의 비조(鼻祖)는 대개 어느 군(君)의 집안에서 나왔는지 상세(詳)하지 못하니, 가승(家乘)에 전(傳)하는 바로는 국룡씨(國龍氏)로써 시조(始祖)를 삼으나, 여러 종인(宗人)이 혹 광윤씨(光允氏)에서 시작(始)되었다 이르니, 이를 수백년(數百年)에서 구(求)하나 능히 취증(取證)함이 없으니 이는 하동(河東)이 보(譜)를 이지러뜨린 것이 둘이다.
한림공(翰林公)의 휘(諱) 본(本)은 우(雨)를 좇았으나 뒤에 풍양비문(豊壤碑文)을 보니 광윤씨(光允氏)가 남자(男子) 여섯이 있으니 휘(諱) 의(儀)ㆍ검(儉)이 부사(府使)로 이 희(熙)ㆍ탄(坦)ㆍ보(輔)ㆍ구(九)ㆍ숭록(崇祿)을 낳았고 묘(墓)가 풍양(豐壤)에 있으니 사자(四子)의 이름이 다 수(水)를 좇았다. 제이자(第二子) 휘(諱) 임(淋)은 또한 이르기를 도승지(都承旨)로써 철산(鐵山)에 적(謫, 귀양)되었다 하니, 그런즉 혹 충식(虫食)함에 물 수(水)에 위 우(雨)를 더함이 시해(豕亥)의 와(訛, 잘못됨)와 같음을 취(取)함인가. 그러나 자설(字說)로써 이를 구(求)하면 우(雨)를 좇는 자는 은좌(殷佐, 은나라를 도움)의 뜻이요 수(水)를 좇는 자는 유적(霤滴, 물방울 떨어짐)의 뜻이니, 공후가(公侯家)에서 자(子)를 위하여 가(嘉, 아름다운 이름)를 줌에 마땅히 우(雨)를 버리고 수(水)를 좇지 아니할 것이며, 하물며 가첩(家牒)에 전(傳)하는 바를 어찌 가히 경이(輕易)히 하리오. 이는 철산(鐵山)이 보(譜)를 이지러뜨린 것이 셋이다.
무릇 삼결(三缺)이 있어 억지로 구(求)하여 보철(補綴, 기워 붙임)하고자 함이 우리 정씨(鄭氏)의 고(古)됨을 귀(貴)히 여김이 아니라, 우리 정씨(鄭氏)에서 귀(貴)한 바는 오직 충효(忠孝)의 인(印)이 대대로 전(禪, 전해짐)됨이니, 그러므로 한 문(門)의 섬홍(纖紅, 자잘함)한 사이에도 모암선생(慕菴先生) 제(弟) 증참의공(贈參議公), 양무공(襄武公) 제(弟) 강서공(江西公), 창성공(昌城公) 제(弟) 부장공(部將公)의 육충(六忠)이 있어 사책(史册)에 빛이 있으니, 비록 이를 궐(闕)하고자 하나 가히 얻지 못할 것이다.
곧 본피(本彼)에서 성(姓)을 받은 이래 수천년(數千年)에 그 경사(慶事)가 이에 철(鐵)에서 발(發)하니, 아아, 우리 정씨(鄭氏) 일선(一線)의 맥(脈)이 어찌 그리 장원(長遠)한가. 병오원보(丙午元譜)의 뒤에 운잉(雲仍, 후손)이 더욱 창(昌)하여 이에 서로 얼굴을 알지 못함에 이르니, 이에 진실로 존조(尊祖)로써 그 지(支)를 통섭(統攝)하고 수족(收族)으로써 그 본(本)에 회귀(會歸)하지 아니하면, 나는 삼결(三缺)로써 가히 근심할 것으로 삼지 않으나 다릉(茶陵) 안씨(顔氏)의 충절(忠節)과 낭야(琅珈) 제갈씨(諸葛氏)의 의열(義烈)을 그 자손(子孫)에게 가르칠 수 없을까 두려우니, 이것이 내가 은연(隱然)히 세보(世譜)에 근심을 이루어 한림(翰林)으로부터 시작(始)을 삼는 까닭이니, 그 옛것(古)을 보존(保存)하는 까닭이다.
경자(庚子) 겨울에 우리 종장(宗長) 부호군(副護軍) 익하씨(益夏氏)가 종인(宗人) 내추(來樞)ㆍ동좌(東佐)ㆍ지현(趾顯)으로써 족유사(族有司)를 삼아 경계(戒)하여 가로되, 「전종장(前宗長) 동중추(同中樞) 신흥씨(信興氏)와 성와거사(省窩居士) 용징(龍徵)이 일찍이 족보(族譜)에 뜻이 있어 침재(鋟梓, 판각하여 인쇄함)를 시작하였는데 물력(物力)이 면박(緜薄, 부족함)하여 종의(宗議)가 서로 다투어(携貳) 그 역사(役事)를 정지(寢)한 지 여섯 해(六年)가 이에 이르렀는데, 불행(不幸)히 동추공(同樞公)이 갑자기 이미 세상을 떠나 그 이룸을 보지 못하였으니 유명(幽明)이 한결같이 한스럽다. 이제 나는 종장(宗長)에 외람히 있어 나이 구십(九十)인데 조모(朝暮)로 시은(視隱, 목숨을 봄)하니 다시 동추공(同樞公)의 유한(遺恨)을 이을까 두려워 눈을 감기 어렵다. 그대들은 이어서 뜻을 이루고 혹 천연(遷延, 지체함)함이 없게 하라」 하니, 모등(某等)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감동(監董)하여 선천(宣川)의 애산재(厓山齋)에서 역(役)을 마치니, 전후(前後)로 집사(執事)하여 보역(譜役)에 수고(勞)한 자 또한 다 하방(下方)에 제명(題名)하였다.
이에 지현(趾顯)이 글로써 와서 나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 족보(族譜)의 경기(經紀)가 여러 해(歲) 신근(辛勤)하여 마침내 이루었으니 그대는 이를 기록(記)하라」 하니, 드디어 삼가 그 말을 받들어 추서(追叙, 뒤미처 씀)함이 이와 같다.
병신(丙申)(一七七六年) 춘(春)
후손(後孫) 장령(掌令) 전(篆)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