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육교보서(戊辰六校譜序)
무진보(戊辰譜)를 발간(發刊)함에 있어 북(北)녁 땅에 거주(居住)하는 종친(宗親)의 안부(安否)조차 알길없어 이북친족(以北親族)과 연계(連繫)가 수록(收錄)되지 못함을 통탄(痛歎)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보(本譜)가 후일(後日) 통일(統一)된 조국(祖國)에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대동보(大同譜)의 기틀이 되기를 절망(切望)합니다. 소위(所謂) 족보(族譜)란 한 씨족(氏族)의 계통(系統)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도표식(圖標式)으로 기록유지(記錄維持)함으로서 친족간(親族間)의 화목(和睦)을 돈독(敦篤)히하고 후손(後孫)들에게 숭조정신(崇祖精神)을 고취(鼓吹)시키는데 기의의(其意義)가 있습니다.
이러한 깊은 뜻을 살리고저 우리 월남친족제위(越南親族諸位)께서 염원(念願)을 모아 서기(西紀) 일구칠일년(一九七一年) 성력(誠力)을 다하여 신해보(辛亥譜)를 편찬(編纂)하였음은 다행(多幸)한 일로서 일대(一大) 경사(慶事)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연(然)이나 신해보(辛亥譜)에 오식(誤植)과 누락(漏落)된 종인(宗人)이 적지 않을뿐더러 십칠년(十七年)이란 세월(歲月)이 경과(經過)함에 따라 등재(登載)되지 못한 새 세대(世代)들의 수(數)가 늘어나게되어 재수보(再修譜)가 불가피(不可避)한 실정(實情)에 있던 중(中) 종친제위(宗親諸位)의 중의(衆意)을 모아 본회(本會)의 의결(議決)을 거쳐 본보(本譜)을 발간(發刊)케 되었습니다.
보역(譜役)을 시작(始作)한지도 어언(於焉) 수년(數年)이 경과(經過)하였으며 진행과정(進行過程)에서 소수(少數)의 이견(異見)이 있었음을 감안(勘案)하여 그 유래(由來)를 해명(解明)코저 합니다. 우리의 족보(族譜)는 일육육육년(一六六六年) 병오보(丙午譜)를 발간(發刊)한 이래(以來) 일구○칠년(一九○七年) 무신보(戊申譜)에 이르기까지 사(四)차례에 걸쳐 보간(補刊)되었으나 항시(恒時) 비조(鼻祖)를 찾지못한 통한(痛恨)을 서문(序文)에 밝히고 있음을 관심(關心)을 갖고 있는 분은 모두 주지(周知)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는 선조(先祖)들이 정확(正確)한 사료(史料)와 문헌(文獻)을 찾지 못하여 차마 이를 수객(收客)치 못한 것에 기인(起因)되며 족보간행(族譜刊行)의 중대성(重大性)을 깊이 인식(認識)하고 신중(愼重)히 처리(處理)한 결과(結果)라고 봅니다.
우리 하동정씨(河東鄭氏)는 동일본관(同一本貫)으로서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삼파(三派)가 있습니다.
첫째 고려조호장(高麗朝戶長) 휘(諱) 도정공(道正公)을 시조(始祖)로 모시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둘째 고려조(高麗朝)의 예부사(禮部事) 휘(諱) 손위공(遜位公)을 시조(始祖)로 모시는 예부사공파(禮部事公派), 셋째 고려고종조(高麗高宗朝)의 정승공(政丞公) 휘(諱) 응공(膺公)을 시조(始祖)로 모시는 정승공파(政丞公派)의 삼계파(三系派)가 존속(存續)되어 왔습니다.
우리 낙향중조(落鄕中祖) 휘(諱) 임한림공(霖翰林公)은 정승공파(政丞公派)의 대종파(大宗派)이십니다. 신해보(辛亥譜) 첫머리에 낙향시조(落鄕始祖)의 상계(上系)를 모신바에 관(關)하여서는 절차상(節次上) 하자(瑕疵)가 인지(認知)된지 아니하여 재론(再論)의 소지(素地)가 없다고 봅니다.
더욱이 전번(前番) 신해보편찬(辛亥譜編纂) 당시(當時) 종친회장(宗親會長) 석해박사(錫海博士)께서 상계(上系)에 대(對)한 연유(緣由)를 명확(明確)하게 서문(序文)으로 기록(記錄)한바 있습니다. 또한 기후(其後)에 우연(偶然)하게도 정승공(政丞公) 이십사대손(二十四代孫) 창모씨(昌模氏)로부터 입수(入手)된 경성회의록(京城會議錄)이 기실증(其實證)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즉(則) 회의록(會議錄)에 의(依)하면 서기(西紀) 일구○구년(一九○九年) 칠월이십칠일자(七月二十七日字) 경성회의(京城會議)에서 철산파(鐵山派) 철봉씨외구명(哲鳳氏外九名) 가산파(嘉山派) 육명(六名) 문절공파(文節公派) 일명(一名) 여주파(驪州派) 일명(一名) 등(等) 십팔명(十八名)의 각파대표(各派代表)가 참석(參席)하여 결의(決議)한 사실(事實)입니다.
시조(始祖) 휘(諱) 응공(膺公)의 출생연대(出生年代)에 대(對)해서도 경성회의(京城會議)에서 고증(考證)한바를 수용(收容)하여 고려덕종(高麗德宗)을 고종(高宗) 삼년(三年)(병자(丙子)) 서기(西紀) 일이일육년(一二一六年)으로 시정(是正)하는 것이 온당(穩當)하다는 작년추계종친회(昨年秋季宗親會)(이사회(理事會)) 의결(議決)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제반종사(諸般宗事)에 다소간(多少間)의 이견(異見)이나 견해(見解)의 차이(差異)는 있을 수 있습니다. 연(然)이나 학문적(學問的)인 고증(考證)이나 문헌(文獻)에 따름이 없이 속단(速斷)이나 추측(推測)만으로 자기(自己)의 주장(主張)을 고집(固執)한다면 이는 결코 합리적(合理的)이고 정당(正當)한 처사(處事)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첨종제위(僉宗諸位)는 문헌(文獻)을 확신(確信)하고 다시는 이론(異論)이 없으시기를 기대(期待)합니다. 보(譜)의 정정(訂正)은 필(必)히 문헌(文獻)이나 사료(史料) 등(等)에 의(依)한 사실(史實)에 입각(立脚)하여 신중(愼重)히 밝혀야 함은 재언(再言)을 요(要)하지 않습니다. 통일(統一)된 후(後)에 남북한친족간(南北韓親族間)에 하나의 대동보(大同譜)를 발간(發刊)할 날을 고대(苦待)하면서 상와간(相瓦間)의 화목(和睦)을 더욱 돈독(敦篤)히 하기를 간절(懇切)히 바랍니다.
삼년여장기간(三年餘長期間)의 보역(譜役)을 추진(推進)함에 있어 팔십노구(八十老軀)를 불고(不顧)하고 불철주야(不徹晝夜) 전념(專念)하신 학산(鶴山) 용건족숙(龍建族叔)을 위시(爲始)하여 직접(直接) 실무(實務)에 헌신(獻身)하신 의산족장(義汕族丈) 십명(十名)의 편찬위원제종(編纂委員諸宗)과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협력(協力)해주신 제위(諸位)의 성의(誠意)에 대(對)하여 깊은 감사(感謝)를 드립니다.
서기(西紀) 일구팔팔년(一九八八年) 십이월말일(十二月末日)
한림공(翰林公) 이십세손(二十世孫) 제독(提督) 원민(元民) 근지(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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