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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동정씨파보서(河東鄭氏派譜序)2026-09-14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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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東鄭氏派譜序

窃伏念鄭氏之籍河東者有三派一以祖於麗朝左政丞公諱膺一以祖於麗朝戶長公諱道正一以祖於麗朝禮部事公諱遜位各祖其祖譜亦各修而惟我始祖政丞公諱膺始貫河東以來五傳而至黙隱公諱熙有三子長曰郡事公諱抱次曰文景公諱招季曰贊成公諱提始分爲三大派而長派大宗孫翰林公諱霖世祖成宗之際言事忤旨流配于宣川後移寓鐵山因家焉譜牒則 肅宗己巳草譜以後 正宗庚申始爲大同譜而大宗派則但載黙隱公之玄孫翰林公諱霖與子敎官公諱龍五世而下註有移寓鐵山譜單未到刊役已設故不得同時刊出以待後時之遺言遺書此則南北懸隔不言可想其當時交通通信之極難者矣其後數次大譜亦以前記遺言遺書載錄而己未得錄鐵山大宗孫之下系亦可想其當時之慨恨矣最近接見鐵山大宗派之譜牒世遠人久中間失傳以派系未詳之說以翰林公爲始爲譜余甚驚懼其失傳疎遠之事遂與冀濂氏純誠氏龍建外諸氏數年間數十次檢討後十月七日因開聯合大宗親會于서울依史稽傳爛商熟議結果推得黙隱公以下年朝之考徵翰林公以上派系之確證以上下連系之義一致决議遂成昔日未遑之事何幸如之何欣如之一驚一喜猶有感淚沾襟者耳然則鐵山譜連上系南韓譜錄宗派是可謂完全譜也鐵山之戊申譜已過之旬南韓之丙寅譜旣經百歲義當修大同譜而今又南北兩斷一無交通通信之往來豈可得大同乎故今則姑以鐵山派譜但載自政丞公以下九世之同行孫錄十世以下則只錄翰林公后孫之越南一部姑修派譜大同譜則以又待後時南北統一之機結論則玆不勝時局紛擾之歎而已惟願吾僉宗伊後待機應燮三大派合一而成完譜則孝悌之心油然而尤生其於敦睦之誼篤厚之風大有所益矣是可爲承先裕後之第一道也相與勉朂有所感發敢以爲序

檀紀四千三百三年 庚戌(一九七○年)十月上澣

 

 

하동정씨파보서(河東鄭氏派譜序)


생각(生覺)하건대 정씨(鄭氏) 관적(貫籍)을 하동(河東)으로 삼는 파(派)가 삼파(三派)인데 일(一)은 고려(高麗) 좌정승공(左政丞公) 휘(諱) 응(膺)을 시조(始祖)로 하는 파(派)이고 일(一)은 고려(高麗) 호장공(戶長公) 휘(諱) 도정(道正)을 시조(始祖)로 하는 파(派)이며 일(一)은 고려(高麗) 예부사공(禮部事公) 휘(諱) 손위(遜位)를 시조(始祖)로 하는 파(派)이다. 이들 삼파(三派)는 각기(各己) 수보(修譜)하였다.

우리 시조(始祖) 정승공(政丞公) 휘(諱) 응(膺)께서 하동시조(河東始祖)가 되신 이후(以后)로 오대(五代)가 전(傳)했더니 묵은공(黙院公) 휘(諱) 희(熙)에 이르러 세 아드님을 두시매 장남(長男)이 군사공(郡事公) 휘(諱) 포(抱)요 차남(次男)이 문경공(文景公) 휘(諱) 초(招)이며 계자(季子)가 찬성공(贊成公) 휘(諱) 제(提)로서 이 세분에 의(依)해 처음으로 삼대파(三大派)로 분파(分派)되었고, 장파(長派) 대종손(大宗孫) 한림공(翰林公) 휘(諱) 임(霖)은 세조(世祖)와 성종(成宗) 치세시(治世時)에 간언(諫言)한 것이 왕지(王旨)에 거슬리어 선천(宣川)에 유배(流配)된 후(後) 다시 철산(鐵山)으로 이사(移徙)하시니 철산낙향(鐵山落鄕)의 대종족(大宗族)이 된 것이다.

족보(族譜)는 숙종(肅宗) 기사(己巳)(일육팔구년(一六八九)年)에 초보(草譜)된 이후(以后) 정종(正宗) 경신(庚申)(일팔○○년(一八○○)年)에 처음으로 대동보(大同譜)를 간행(刊行)하였는데 거기에 대종파(大宗派)로는 다만 묵은공(黙隱公)의 현손(玄孫)인 한림공(翰林公) 휘(諱) 임(霖)과 그 아들 교관공(敎官公) 휘(諱) 용(龍)까지 오세(五世)만을 등재(登載)하였다. 철산보단(鐵山譜單)이 도착(倒着)되지 않았는데 벌써 간역소(刊役所)가 설치(設置)되어 간행업무(刊行業務)를 추진(推進)하고 있으므로 중단(中斷)할 수 없는 형편(形便)이라서 다음 합보시(合譜時)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기록(記錄)을 남기고 간역(刊役)을 계속(繼續)하였다.

그러나 오세이하(五世以下)에 대(對)해서는 그 밑에 주(註)하기를 철산(鐵山)에 이주(移住)하여 살고 있으므로 남북(南北)의 거리(距離)가 현격(懸隔)하게 멀어 교통(交通)과 통신사정(通信事情)이 극(極)이 불편(不便)한 관계(關係)로 철산(鐵山)의 단자(單子)가 미처 도착(到着)되지 않아 여기에 싣지 못하니 이는 다음 합보시(合譜時)에 등재(登載)되기를 기다릴 따름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후 수차(數次)에 걸쳐 발간(發刊)된 합보(合譜)에도 또한 전기(前記)의 유언(遺言)과 유서(遺書)를 기록(記錄)하였을 뿐 철산대종손(鐵山大宗孫)의 하계(下系)를 등재(登載)하지 못하였으니 당시(當時)로서는 개탄(慨嘆)스러운 일이었음을 상상(想像)할 수 있다.

최근(最近) 철산대종파(鐵山大宗派)의 보첩(譜牒)을 접(接)할 수 있었는데 세월(歲月)이 오래되고 사람도 바뀌었으므로 중간부분(中間部分)이 실전(失傳)되어 그 파계(派系)를 상세(詳細)히 이을 수 없어 한림공(翰林公)을 기수(起首)로 하여 수보(修譜)하였다고 하니 내 심(甚)히 놀랍고도 걱정되는 것은 그 실전(失傳)된 부분(部分)이 세월(歲月)이 흘러갈수록 더욱 아득해 진다는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드디어 기렴씨(冀濂氏), 순성씨(純誠氏), 용건씨(龍建氏) 등(等) 제씨(諸氏)와 더불어 수년간(數年間) 수십차(數十次)에 걸쳐 실전(失傳)된 부분(部分)을 조사(調査)하고 연구(硏究)한 뒤에 마침내 십월칠일(十月七日) 연합대종친회(聯合大宗親會)가 서울에서 개최(開催)되어 그 자리에서 사승(史乘)과 기타(其他) 관련(關聯)되는 도적(圖籍)에서 참고(參考)하고 조사(調査)한 내용(內容)을 깊이있게 논의(論議)한 결과(結果) 묵은공(黙隱公) 이하(以下)의 연조(年條)를 고징(考徵)할 수 있으므로써 한림공(翰林公) 이상(以上)의 계파(系派)가 확실(確實)해져 상(上)과 하(下)의 보계(譜系)가 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보의(譜義)가 일치(一致)하여 우리 문중(門中)의 오랜 숙제(宿題)였던 문제(問題)가 어려운 작업(作業) 끝에 해결(解決)된 것이 다행(多幸)스런 일이라 생각되어 한편으로는 놀래고 한편으로는 기쁨의 눈물을 금(禁)할 수 없다.

이리하여 철산보(鐵山譜)가 남한보록종파계(南韓譜錄宗派系)와 상하(上下)가 상련상영(相連相迎)하니 이것을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족보(族譜)라고 할 수 있다. 철산(鐵山)의 무신보(戊申譜)(일구○팔년(一九〇八年))가 간행(刊行)된지 이미 육십년(六十年)이 경과(經過)되었고, 남한(南韓)의 병인보(丙寅譜)(일팔육육년(一八六六年))는 출간(出刊)된지 이미 백년(百年)이 지났으니 마땅히 대동보(大同譜)를 수보(修譜)할 시기(時期)가 되었다고 하겠는데 이제 또 남북(南北)으로 양단(兩斷)되어 인사(人事)의 왕래(往來)나 통신전달(通信傳達)이 불가능(不可能)하여 대동보(大同譜)를 수보(修譜)할 기회(機會)를 잃었다.

지금(至今)은 철산보(鐵山譜)에 다만 정승공이하(政丞公以下) 구세동행손(九世同行孫)까지만 등재(登載)하고 십세이하(十世以下)는 한림공(翰林公) 후손(後孫)으로서 월남(越南)한 자손일부(子孫一部)만을 등재(登載)하여 파보(派譜)로 그치고 말았으니 대동보(大同譜)는 또 남북통일(南北統一) 뒤에나 그 수보(修譜)를 거론(擧論)할 수 있을 것이다.

시국(時局)의 간난(艱難)으로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없으니 원(願)하건대 첨종(僉宗)께서는 삼대파(三大派)가 합보(合譜)될 기회(機會)가 도래(到來)할 때까지 응변(應變)의 준비(準備)를 충실(忠實)히 했다가 마침내 합보(合譜)되는 날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일어나 일가간(一家間)에 돈목(敦睦)의 정의(情誼)와 돈후(敦厚)의 풍(風)을 낳게 되리니 이는 우리 일족(一族)의 번영(繁榮)에 크게 유익(有益)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조(先祖)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따르고 태어날 후손(後孫)들을 유족(裕足)하게 하는 으뜸가는 도리(道理)일 것이니 이를 위(爲)하여 첨종(僉宗)께서 각기(各己) 힘써야 할 것이다.


일구칠○년(一九七〇年)(단기(檀紀) 사삼○삼년(四三〇三年) 경술시월상한(庚戌十月上澣))에

묵은공(黙隱公) 십구세손(十九世孫) 윤식(潤植)이 근서(謹序)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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