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정씨파보서(河東鄭氏派譜序)
생각(生覺)하건대 정씨(鄭氏) 관적(貫籍)을 하동(河東)으로 삼는 파(派)가 삼파(三派)인데 일(一)은 고려(高麗) 좌정승공(左政丞公) 휘(諱) 응(膺)을 시조(始祖)로 하는 파(派)이고 일(一)은 고려(高麗) 호장공(戶長公) 휘(諱) 도정(道正)을 시조(始祖)로 하는 파(派)이며 일(一)은 고려(高麗) 예부사공(禮部事公) 휘(諱) 손위(遜位)를 시조(始祖)로 하는 파(派)이다. 이들 삼파(三派)는 각기(各己) 수보(修譜)하였다.
우리 시조(始祖) 정승공(政丞公) 휘(諱) 응(膺)께서 하동시조(河東始祖)가 되신 이후(以后)로 오대(五代)가 전(傳)했더니 묵은공(黙院公) 휘(諱) 희(熙)에 이르러 세 아드님을 두시매 장남(長男)이 군사공(郡事公) 휘(諱) 포(抱)요 차남(次男)이 문경공(文景公) 휘(諱) 초(招)이며 계자(季子)가 찬성공(贊成公) 휘(諱) 제(提)로서 이 세분에 의(依)해 처음으로 삼대파(三大派)로 분파(分派)되었고, 장파(長派) 대종손(大宗孫) 한림공(翰林公) 휘(諱) 임(霖)은 세조(世祖)와 성종(成宗) 치세시(治世時)에 간언(諫言)한 것이 왕지(王旨)에 거슬리어 선천(宣川)에 유배(流配)된 후(後) 다시 철산(鐵山)으로 이사(移徙)하시니 철산낙향(鐵山落鄕)의 대종족(大宗族)이 된 것이다.
족보(族譜)는 숙종(肅宗) 기사(己巳)(일육팔구년(一六八九)年)에 초보(草譜)된 이후(以后) 정종(正宗) 경신(庚申)(일팔○○년(一八○○)年)에 처음으로 대동보(大同譜)를 간행(刊行)하였는데 거기에 대종파(大宗派)로는 다만 묵은공(黙隱公)의 현손(玄孫)인 한림공(翰林公) 휘(諱) 임(霖)과 그 아들 교관공(敎官公) 휘(諱) 용(龍)까지 오세(五世)만을 등재(登載)하였다. 철산보단(鐵山譜單)이 도착(倒着)되지 않았는데 벌써 간역소(刊役所)가 설치(設置)되어 간행업무(刊行業務)를 추진(推進)하고 있으므로 중단(中斷)할 수 없는 형편(形便)이라서 다음 합보시(合譜時)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기록(記錄)을 남기고 간역(刊役)을 계속(繼續)하였다.
그러나 오세이하(五世以下)에 대(對)해서는 그 밑에 주(註)하기를 철산(鐵山)에 이주(移住)하여 살고 있으므로 남북(南北)의 거리(距離)가 현격(懸隔)하게 멀어 교통(交通)과 통신사정(通信事情)이 극(極)이 불편(不便)한 관계(關係)로 철산(鐵山)의 단자(單子)가 미처 도착(到着)되지 않아 여기에 싣지 못하니 이는 다음 합보시(合譜時)에 등재(登載)되기를 기다릴 따름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후 수차(數次)에 걸쳐 발간(發刊)된 합보(合譜)에도 또한 전기(前記)의 유언(遺言)과 유서(遺書)를 기록(記錄)하였을 뿐 철산대종손(鐵山大宗孫)의 하계(下系)를 등재(登載)하지 못하였으니 당시(當時)로서는 개탄(慨嘆)스러운 일이었음을 상상(想像)할 수 있다.
최근(最近) 철산대종파(鐵山大宗派)의 보첩(譜牒)을 접(接)할 수 있었는데 세월(歲月)이 오래되고 사람도 바뀌었으므로 중간부분(中間部分)이 실전(失傳)되어 그 파계(派系)를 상세(詳細)히 이을 수 없어 한림공(翰林公)을 기수(起首)로 하여 수보(修譜)하였다고 하니 내 심(甚)히 놀랍고도 걱정되는 것은 그 실전(失傳)된 부분(部分)이 세월(歲月)이 흘러갈수록 더욱 아득해 진다는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드디어 기렴씨(冀濂氏), 순성씨(純誠氏), 용건씨(龍建氏) 등(等) 제씨(諸氏)와 더불어 수년간(數年間) 수십차(數十次)에 걸쳐 실전(失傳)된 부분(部分)을 조사(調査)하고 연구(硏究)한 뒤에 마침내 십월칠일(十月七日) 연합대종친회(聯合大宗親會)가 서울에서 개최(開催)되어 그 자리에서 사승(史乘)과 기타(其他) 관련(關聯)되는 도적(圖籍)에서 참고(參考)하고 조사(調査)한 내용(內容)을 깊이있게 논의(論議)한 결과(結果) 묵은공(黙隱公) 이하(以下)의 연조(年條)를 고징(考徵)할 수 있으므로써 한림공(翰林公) 이상(以上)의 계파(系派)가 확실(確實)해져 상(上)과 하(下)의 보계(譜系)가 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보의(譜義)가 일치(一致)하여 우리 문중(門中)의 오랜 숙제(宿題)였던 문제(問題)가 어려운 작업(作業) 끝에 해결(解決)된 것이 다행(多幸)스런 일이라 생각되어 한편으로는 놀래고 한편으로는 기쁨의 눈물을 금(禁)할 수 없다.
이리하여 철산보(鐵山譜)가 남한보록종파계(南韓譜錄宗派系)와 상하(上下)가 상련상영(相連相迎)하니 이것을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족보(族譜)라고 할 수 있다. 철산(鐵山)의 무신보(戊申譜)(일구○팔년(一九〇八年))가 간행(刊行)된지 이미 육십년(六十年)이 경과(經過)되었고, 남한(南韓)의 병인보(丙寅譜)(일팔육육년(一八六六年))는 출간(出刊)된지 이미 백년(百年)이 지났으니 마땅히 대동보(大同譜)를 수보(修譜)할 시기(時期)가 되었다고 하겠는데 이제 또 남북(南北)으로 양단(兩斷)되어 인사(人事)의 왕래(往來)나 통신전달(通信傳達)이 불가능(不可能)하여 대동보(大同譜)를 수보(修譜)할 기회(機會)를 잃었다.
지금(至今)은 철산보(鐵山譜)에 다만 정승공이하(政丞公以下) 구세동행손(九世同行孫)까지만 등재(登載)하고 십세이하(十世以下)는 한림공(翰林公) 후손(後孫)으로서 월남(越南)한 자손일부(子孫一部)만을 등재(登載)하여 파보(派譜)로 그치고 말았으니 대동보(大同譜)는 또 남북통일(南北統一) 뒤에나 그 수보(修譜)를 거론(擧論)할 수 있을 것이다.
시국(時局)의 간난(艱難)으로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없으니 원(願)하건대 첨종(僉宗)께서는 삼대파(三大派)가 합보(合譜)될 기회(機會)가 도래(到來)할 때까지 응변(應變)의 준비(準備)를 충실(忠實)히 했다가 마침내 합보(合譜)되는 날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일어나 일가간(一家間)에 돈목(敦睦)의 정의(情誼)와 돈후(敦厚)의 풍(風)을 낳게 되리니 이는 우리 일족(一族)의 번영(繁榮)에 크게 유익(有益)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조(先祖)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따르고 태어날 후손(後孫)들을 유족(裕足)하게 하는 으뜸가는 도리(道理)일 것이니 이를 위(爲)하여 첨종(僉宗)께서 각기(各己) 힘써야 할 것이다.
일구칠○년(一九七〇年)(단기(檀紀) 사삼○삼년(四三〇三年) 경술시월상한(庚戌十月上澣))에
묵은공(黙隱公) 십구세손(十九世孫) 윤식(潤植)이 근서(謹序)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