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정씨족보서(河東鄭氏族譜序)
정씨(鄭氏)의 하동관적(河東貫籍)은 일찍이 고려조(高麗朝) 좌정승(左政丞) 휘(諱) 응(膺)에서 시작(始作)되고, 사대(四代)를 지나면서 묵은공(黙隱公)이 나셨으니 공(公)은 포은문인(圃隱門人)으로서 이씨조선(李氏朝鮮)에 입사(入仕)하지 않은 절조(節操)를 보이셨다. 공(公)의 세 아드님이 모두 높은 벼슬을 지내시고 후손(後孫)이 번창(繁昌)하여 삼파(三派)로 분봉(分封)되었으니 그 계보(系譜)가 이루어진지 오래이다.
이어 십여세대(十餘世代)를 내려오면서 학문(學問)을 계승(繼承)하고 충효(忠孝)를 대대(代代)로 전(傳)하였으니, 문절공(文節公)의 벼슬과 덕망(德望), 죽은공(竹隱公)의 지절(志節), 옥야공(玉野公)과 난곡공(蘭谷公)의 조예(造詣)깊은 학문(學問)과 높은 절의(節義), 쌍벽헌(雙碧軒) 지족당(知足堂)의 높은 문학세계(文學世界)와 지극(至極)한 조행(操行)이 모두 역사(歷史)에 혁혁(赫赫)하였고, 그 발상(發祥)이 이같이 성(盛)할 수 있었을까.
또한 약포공(藥圃公)이 우옹(尤翁)의 일에 대(對)해 솔선(率先)하여 일신(一身)을 잊은 채 항소(抗疏)했던 사실(事實)은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
지금 제파(諸派)가 육로(六路)에 산재(散在)하여 족보(族譜)를 오랫동안 증수(增修)하지 못하였음을 한(恨)스럽게 여겨왔더니 비로소 증수(增修)가 이루어지게 되어 쌍벽헌(雙碧軒)의 오대손(五代孫) 운수(雲需)가 수보(修譜)를 주관(主管)하였다. 약포공(藥圃公)의 현손(玄孫) 동진(東璡)이 나에게 와서 서문(序文)을 부탁(付託)하니,
아아! 우리나라의 족당성습(族黨成習)이 고질화(痼疾化)되어서 일문(一門)을 분할(分割)하고 한집을 둘로 갈라 상잔(相殘)하는 혹독(酷毒)한 짓을 그침없이 저질러 왔으나 하동정씨일문(河東鄭氏一門)은 한사람이라도 뜻을 달리하는 자(者)가 없이 모두 율곡(栗谷), 우암(尤菴) 양현(兩賢)을 숭모(崇慕)하고 그 선조(先祖)를 높이 받들어 추앙(追仰)하니 이는 후손(後孫)들이 도동내서(到東來西)함이니 과연(果然)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자손(子孫)들이 감(敢)히 이 족보(族譜)를 보고 선조(先祖)를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니 이것이 타보(他譜)와는 다른 점(點)이라 하겠다. 그러니 어느 누가 감(敢)히 우리 가문(家門)이 근대(近代)에 와서 부진(不振)하다고 과소평가(過小評價)하겠는가. 이 보첩(譜牒)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효제(孝悌)의 마음이 생기게 할 것이고 충의(忠義)의 행실(行實)을 더할 것인즉 이로써 제계(諸系)가 명백(明白)해졌으니 서로 면려(勉勵)해야 할 것이다.
숭정후삼년(崇禎後三年) 경신(庚申)(일팔○○년(一八○○年) 정조이십사(正祖二十四)) 중춘(仲春)
숭정대부(崇禎大夫)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성균관좨주(兼成均館祭酒) 세자이사(世子貳師) 송환기(宋煥箕)가 서(序)하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이조참판(行吏曹參判) 겸동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兼同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민소혁(閔召爀) 서(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