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충신직제학(高麗忠臣直提學) 묵은공행적(黙隱公行蹟)
공(公)의 휘(諱)는 희(熙)요 호(號)는 묵은(黙隱)이라. 태자첨사(太子詹事) 좌정승공(左政丞公) 휘(諱) 응(膺)의 오세손(五世孫)인 하천군(河川君) 평장사(平章事) 휘(諱) 계(綮)의 증손(曾孫)으로 고(考)의 휘(諱)는 태보(台輔)이더니 약관(弱冠)의 나이에도 이르지 않아서 세상(世上)을 떠나매 밀직원부사(密直院副使)에 추증(追贈)되었다. 선비(先妣)는 백천조씨(白川趙氏) 삼중대광(三重大匡) 평장사(平章事) 량(亮)의 따님으로서 현부인(縣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공(公)께서는 대구부(大邱府) 해안현(解顏縣) 삼태동(三台洞)에서 출생(出生)하셨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바가 있더니 점점 자라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고 성품(性品)이 탁월(卓越)하며 기상(氣像)과 금도(襟度)가 크고 넓어 총영(聰穎)이 절륜(絶倫)하였다. 또한 품은 뜻이 높고 범상(凡常)하지 않아 매번 책을 읽을 때 절의(節義)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격찬(激讚)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인(成人)이 되어서 달성서씨(達城徐氏) 목사(牧師) 고(翶)의 따님을 맞이하셨는데 서공(徐公)이 공(公)을 심히 아끼고 중(重)히 여겼다.
이때에 포은선생(圃隱先生)께서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일세(一世)의 사표(師表)로서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숭앙(崇仰)되었는데, 공(公)이 선생(先生)을 종사(從師)하기로 결심(決心)하고 해안현(解顏縣)에서 송동(松東) 나복산(蘿葍山) 서(西)쪽으로 옮겨가니 포은선생댁(圃隱先生宅)과 바로 이웃했다. 조석(朝夕)으로 선생(先生)께 나아가 수년(數年)에 걸쳐 학문(學問)을 연마(硏磨)하고 훈도(薰陶)를 받았더니, 홍무병진(洪武丙辰)(우왕이년(禑王二年)) 일삼칠육년(一三七六年)에 진사시(進士試)에 수석(首席)으로 등과(登科)하고 같은 해에 문과(文科)에 탁제(擢第)되어 이후로 청현(淸顯)의 요직(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다가 공양왕(恭讓王) 신미(辛未) 구월(九月)에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승진(昇進)하였다가 이 해에 또 진현관직제학(進賢舘直提學)에 올랐다.
임신년(壬申年) 봄에 포은선생(圃隱先生)이 고려(高麗)의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홀로 사직(社稷)을 지키고자 충절(忠節)을 다하였다. 공(公)께서 간신적자(奸臣賊子)들이 권세(權勢)를 농락(弄絡)하여 나라가 날로 기울어감을 통분(痛憤)하게 여기시고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等) 십여인(十餘人)과 함께 소(疏)를 올려 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ㆍ조준(趙浚) 등(等)의 죄(罪)를 논(論)하기를,
「도전(道傳)은 출신(出身)이 미천(微賤)한 자(者)로 외람(猥濫)되게도 당사(堂司)에 올라 자신(自身)이 한미(寒微)한 출신(出身)임을 은폐(隱蔽)하고 군주(君主)를 몰아내고자 하여 강비(姜斐)의 죄(罪)를 조작(造作)함으로써 여러 사람을 이에 연루(連累)시켰습니다. 조준(趙浚) 또한 경상(卿相) 몇 사람으로 하여금 조정(朝廷)에 원한(怨恨)을 맺게 하고 도전(道傳)과 더불어 함께 매권작당(賣權作黨)하며 유인협박(誘引脅迫)하여 권세(權勢)를 농간(弄奸)했는가 하면 남은(南誾) 등(等)을 선동(煽動)하여 우익(羽翼)의 역할(役割)을 담당(擔當)하게 하고 또 윤소종(尹紹宗)ㆍ조박(趙璞) 등(等)으로 하여 유언비어(流言蜚語)로 임금의 명(命)을 일삼아 죄강(罪綱)을 확장(擴張)하고 민중(民衆)의 마음을 혼란(混亂)에 빠뜨렸습니다. 이들이 모여 일을 꾸미고 악의(惡意)로 불측(不測)의 변(變)을 도모(圖謀)하고자 하니 이들 악(惡)의 무리가 크게 번성(繁盛)하기 전(前)에 제거(除去)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오며, 전하(殿下)께서 우유부단(優柔不斷)하시면 뭇 백성(百姓)의 원한(怨恨)을 사게 됨은 물론(勿論)이고 이를 뒤늦게 후회(後悔)하시고 바로 잡으려고 하시면 미치지 못할 지경(地境)에 이를까 두렵사오니, 유사(攸司)에게 명(命)하시어 조준(趙浚)ㆍ남은(南誾) 등(等)의 직첩(職牒)과 공로(功勞)를 거두어들이시고 그들이 저지른 죄과(罪過)를 물어 시형(施刑)의 공정(公正)함을 널리 알리시고 도전(道傳)을 유배(流配)시켜 죄형(罪刑)을 철저(徹底)히 시행(施行)하소서」라고 했다.
소장(疏狀)이 중궁(中宮)에 올려진지 수일후(數日後)에 또 다시 대궐문(大闕門) 앞에 엎드려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히기를 청(請)하였고, 공(公)께서 또 대사헌(大司憲) 유백(惟伯)과 더불어 연일(連日) 주청(奏請)하여 준(浚)ㆍ은(誾)ㆍ도전(道傳) 등(等)을 처단(處斷)할 것과 오사충(吳思忠)도 유배(流配)하도록 청(請)했다. 이에 왕(王)이 드디어 준(浚)ㆍ은(誾) 등(等)의 죄(罪)를 국문(鞠問)하였다.
그 해 사월(四月) 을묘(乙卯) 사일(四日)에 포은선생(圃隱先生)이 순국(殉國)하자 공(公)께서도 화(禍)를 입었으니, 먼저 공(公)과 김진양(金震陽) 등(等) 제인(諸人)을 원지(遠地)로 유배(流配)하였는데 공(公)은 해도(海島)로 유배(流配)되어 이후로 구년(九年) 동안 적소(謫所)에서 세월(歲月)을 보내셨다. 이때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은 이미 종언(終焉)을 고(告)했다.
그 뒤 이조(李朝) 태조경진(太祖庚辰)에 공(公)이 사면(赦免)되어 장자(長子) 휘(諱) 포(抱)에게 돌아왔는데 당시(當時) 포(抱)는 백의서생(白衣書生)으로 상원군사(祥原郡事)로 제수(除授)되었다. 공(公)은 그 길로 해안(解顏) 구거(舊居)로 가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여 은둔(隱遁)하시매 수의자중(守義自重)하시다가 만년(晩年)에 한성부(漢城府) 하현지(河峴地)에 이둔(移遯)하였으나 곧 별세(別世)하셨다.
그 후(後)에 차자(次子) 문경공(文景公)이 귀현(貴顯)의 직위(職位)에 있었으므로 공(公)에게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兼) 예문관집현전대제학(藝文館集賢殿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경향(京鄕) 각지(各地)에서 공(公)의 정절(貞節)과 충성심(忠誠心)을 기리더니 광주(光州) 화담사(花潭祀)에 철향(腏享)하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과 대구(大邱)의 사림(士林)이 또한 공(公)의 충절(忠節)과 덕의(德義)를 추모(追慕)하며 팔공산(八公山) 아래 백안동(百安洞) 묘곡(妙谷)에 공(公)을 위(爲)해 단(壇)을 쌓고 향사(享祀)하였다.